시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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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시의 세계 2021. 12. 8. 11:01
빨래 / 이희정 육체가 침상에 널린 동안 나를 벗어버린 꿈들은 시공을 접어 빨래를 한다 내가 벗어던진 옷들은 낮은 돌담에서 애기똥풀 달래거나 작은 발자국들 오종종 마르는 갯고랑 고무신짝 위에서 큰 바다바람에 부풀고 때론 삶아져 수줍게 소독되었다 허수아비 감고 배알 없는 춤 추다가 쪽방 창가에 매달려 고드름 서걱거리고 아내 무릎 앞 다림질 기다리기도 했다 그러나 눈뜨면 늘 세탁기 쳇바퀴 속이었다 호청 밟으며 턱 들어 멀리 보시던 어머니 제자리걸음은 어디만큼 가셨을까 시집 '푸른누에'(학산문학사)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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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를 팝니다시의 세계 2021. 11. 22. 09:09
무지개를 팝니다 / 이희정 숲과 들, 바다의 축복들 아카펠라 화풍의 접시에 아울렀을 때 까다롭고 높은 인증셔터들이 착각착각 목젖을 울려댔다 우아한 저작의 흔적들 잠겨 합장으로 버무리는 애벌 설거지통에 무지개 거품 산란하고 야단법석의 세척기 종료부저 울면 최저시급(最低時急)의 진공 풀어져 수채 젯밥이 소복하다 공룡 뒹굴던 고령토, 사기접시들 색색(色色) 꿈결 잠속에 거우르면 가로등 굽은 어깨 위에 무지개 알바이력 한 줄 보태어 볕바른 캠퍼스 빚어낸 초벌구이 구인 검색화면 유약 빛에 젖어든다 2018공주문인협 시화전 출품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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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구역 사철나무시의 세계 2021. 10. 21. 11:16
재개발구역 사철나무 / 이희정 빈 창틀과 밤새워 속닥거리더니 다발 중심에 솟은 외가지도 눈과 눈이 맞았다 까치를 휘청 쏘아올린 활시위에서 날리는 것은 깃털일까 눈송이일까 십여 년 사철 내내 지워지던 발자국들 모아모아 푸른 잎으로 길러냈지 난무의 설(說) 뿌렸던 까치야, 그믐엔 네가 그려봐 까치 발우물이 촉촉해온다, 녹아내리는 것은 해바라기 노인의 그림자일까 추락한 애드벌룬일까 청사진 패널마저 붉은 눈물 흘리고 일찍 털린 외가지가 햇살을 장전하자 골목 탄착점들이 다투어 까발리기 시작한다 개발 새발, 괴발개발 작가 노트 '공주문학' 25집에 발표한 시입니다. 재개발 구역의 지하빌라에 머물던 시절 을씨년스런 폐허의 거리에 축복처럼 눈이 내리던 날의 감동과 풀린 날씨에 녹아내리며 드러나던 풍경이 재개발 승인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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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누에시의 세계 2021. 9. 7. 13:40
푸른 누에 1 잠이 단 날은 꿈이 없었다 꿈을 꾼 날은 배가 고팠다 2 잎맥 삼천 발 먹고 넉잠은 자고 나서야 명주실 윤기 흐르는 방에서 비단날개 기다린다 했던가 스스로 허물 벗지 못한 무녀리의 서글픈 저녁나절 그림자 부쩍 자라난 몸마디는 실루엣으로 마른가지 위 탈선한 열차처럼 기울었네 머리 세워 허공 저작하는 주둥이여 저 석양줄기 몇 올 갉을 수 있다면 해묵은 아궁이 속 불 지피어 질긴 삶 몇 가닥 투명하게 삶아낼 수 있다면 막다른 골목이여 푸근한 섶 되어다오 가난한 별들 음표 그어 빛으로 노래하지 않는가 이희정 시집 '푸른 누에'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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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의 시시의 세계 2021. 8. 6. 09:01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날리는 날 힌당나귀타고 산골로 가쟈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쟈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리 없다 언제부터 내속에 고조곤히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힌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것이다 ----------------------------------------------------------------------..